존 싱어 사전트의 <와인잔> 속에 담긴 '부재의 미학'을 탐험합니다. 뜨거운 여름 햇살 아래 남겨진 두 잔의 레드 와인, 그리고 그 투명한 붉은빛을 닮은 서늘한 피노 누아 한 잔의 여유를 만나보세요.
초록빛 덩굴 잎사귀 사이로 눈부신 여름 햇살이 쏟아집니다.
방금 전까지 누군가 머물렀던 흔적만이 정물처럼 남아 있는 테라스.
주인을 잃은 두 개의 와인잔, 그리고 그 안에 찰랑이는 투명한 붉은 빛.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그림 앞에서 누군가의 낮은 웃음소리와
공기를 타고 흐르는 은밀한 대화를 듣게 됩니다.
🎨 빛의 마술사, 존 싱어 사전트가 포착한 찰나
이 매혹적인 작품의 정보를 먼저 살펴볼까요?
- 작가: 존 싱어 사전트 (John Singer Sargent, 1856–1925)
- 작품명: 와인잔 (Wineglasses)
- 제작 시기: 1875년경 (사전트 나이 19세)
- 소장처: 런던 내셔널 갤러리 (National Gallery, London)
![[존 싱어 사전트, <자화상(Self-Portrait)>, 1886년경, 애버딘 미술관 소장]](https://blog.kakaocdn.net/dna/w1KhP/dJMcafeFfdd/AAAAAAAAAAAAAAAAAAAAAKo4s5SnaDzIfwBB9qoqOueSGv7bYoAz3PlHZLVb5eHc/img.webp?credential=yqXZFxpELC7KVnFOS48ylbz2pIh7yKj8&expires=1777561199&allow_ip=&allow_referer=&signature=gSNadR0APSp8IjWjJHDSVCww9mE%3D)
사전트는 당대 최고의 '셀럽 화가'였습니다. 유럽의 귀족과 미국의 부호들이 그의 앞에 줄을 서서 초상화를 의뢰했죠. 그가 그린 <마담 X>는 파리 전역을 스캔들로 몰아넣을 만큼 치명적인 매력을 자랑했습니다. 하지만 그 화려한 명성이 시작되기 전, 열아홉 살의 사전트는 이곳 베네쿠르에서 오직 '빛' 그 자체를 탐구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소개할 <와인잔>은 거대한 초상화 뒤에 가려진 거장의 순수한 천재성과, 인상주의에 매료되었던 청년 시절의 고뇌를 보여주는 보석 같은 작품입니다.
그가 화려한 초상화로 명성을 떨치기 전인 1875년 여름, 열아홉 살의 청년 사전트는 동료 화가들과 함께 파리 근교 세느강 변의 작은 마을 베네쿠르(Bennecourt)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이곳은 일찍이 클로드 모네와 에밀 졸라가 머물며 인상주의의 영감을 얻었던 장소이기도 하죠.
사전트는 강변 여관의 야외 테라스에 앉아, 격자무늬 가림막 사이로 부서져 내리는 눈부신 햇살에 매료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빛이 투명한 유리잔과 붉은 와인을 통과하며 만들어내는 찰나의 마법을 캔버스에 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보고 있는 <와인잔>의 탄생 배경입니다.
✨ 부재 속의 술: 붉은 와인 속에 투영된 여름의 빛
사전트는 왜 화려한 인물 대신 비어 있는 테이블을 그렸을까요?

① 빛과 유리, 투명함의 정점
사전트는 유리잔의 투명함과 그 안에 담긴 와인의 농도를 놀랍도록 정교하게 표현했습니다. 격자 가림막을 통과한 햇빛이 잔의 테두리에 맺히는 순간을 보세요. 특히 잔에 담긴 와인의 붉은 빛깔은 뒤편의 녹색 잎사귀와 보색 대비를 이루며 더욱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붓 터치는 거칠지만, 그 결과는 지독할 정도로 사실적입니다.
② 채워진 잔과 비워진 잔이 건네는 말
테이블 위 두 잔은 같은 듯 서로 다릅니다.
잔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인물을 지워버림으로써, 사전트는 오히려 독자가 그 자리에 앉아 각자의 이야기를 상상하게 만듭니다. 술은 대화의 밀도를 짐작하게 하는 유일한 단서가 됩니다.
🖤 세상을 발칵 뒤집은 스캔들, <마담 X>
사전트의 이름을 역사에 영원히 각인시킨 것은 바로 이 작품, <마담 X>였습니다.

파리 사교계 최고의 미녀였던 비르지니 고트로를 모델로 한 이 그림이 공개되자 파리는 거대한 충격에 빠졌습니다. 흘러내릴 듯 위태로운 어깨끈과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관능미였죠.
비난이 쏟아지자 사전트는 결국 파리를 떠나 런던으로 이주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 스캔들은 역설적으로 그를 대체 불가능한 거장의 반열에 올려놓았습니다.
지난해 2025년은 사전트의 서거 100주년, 사전트 관련 행사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아래 링크한 잡지 arte(한국경제패밀리) 기사에서 작가 사전트의 삶과 작품을 둘러보시기 바랍니다.

19세기 미술사 최악의 스캔들 '마담X', 40년 만에 파리로?
메트로폴리탄미술관과 파리 오르세미술관이 공동 기획한 이 전시는 지난해 8월 3일까지 뉴욕서, 9월부터 오르세 미술관으로 9월부터 파리 오르세 미술관으로 옮겨서 진행되었다. 프랑스에서 열린 사전트의 첫 단독 전시이자, ‘마담X’가 40여년 만에 처음으로 프랑스로 건너간 사건이였다. 그가 죽은 지 100년이 지난 지금, 프랑스 비평가들은 이 전시를 어떻게 해석할까.
뉴욕=김보라 기자
💡 [TMI / 비하인드 스토리]
- 여름에 레드 와인?: 19세기 프랑스 카페에서 맥주만큼이나 흔했던 것은 가벼운 레드 와인이었습니다. 당시엔 레드 와인도 야외 테라스에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약간 시원하게(Cellar temperature) 즐기기도 했죠.
- 모네와의 인연: 사전트가 이 그림을 그린 베네쿠르는 클로드 모네가 즐겨 찾던 장소이기도 합니다. 사전트는 이곳에서 인상주의자들과 교류하며 '빛을 그리는 법'을 완성해 나갔습니다.
- 런던 내셔널 갤러리의 보물: 이 작은 그림은 현재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서 관람객들을 멈춰 세우는 '작지만 강한' 작품으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 [Deep Dive] 와인잔 이야기: 사전트가 그린 그 잔
그림 속 유리잔을 자세히 보면, 오늘날 우리가 쓰는 크고 화려한 와인잔과는 조금 다른 모습입니다.
사전트가 그린 19세기의 잔:
당시 프랑스 시골의 여관(Auberge)에서 쓰던 잔은 오늘날의 '유니버설 잔'이나 '화이트 와인잔'과 비슷하게 작고 튤립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레드 와인도 지금처럼 거대한 볼(Bowl)에 담아 마시기보다, 적당한 크기의 잔에 담아 시원하게 즐기는 것이 일반적이었죠.
레드 와인잔 vs 화이트 와인잔, 왜 다를까?
현대 와인 과학은 잔의 모양이 맛을 결정한다고 말합니다.
- 레드 와인잔: 공기와 접촉하는 면적을 넓히기 위해 볼이 크고 넓습니다. 와인이 '숨을 쉬게(Aeration)' 하여 떫은맛을 줄이고 복합적인 향을 피워 올리기 위함이죠.
- 화이트 와인잔: 차가운 온도를 유지하고 섬세한 꽃향기를 보존하기 위해 볼이 좁고 작습니다.
사전트의 그림 속 레드 와인이 유독 맑고 투명해 보이는 이유는, 그 시대의 작은 잔이 와인의 붉은 빛을 응축시켜 보여주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 The PICK : 햇살 아래 즐기는 서늘한 루비빛, ‘피노 누아(Pinot Noir)’
그림 속 투명하고 맑은 레드 와인의 색감을 그대로 옮겨온 듯한 술, 프랑스 부르고뉴의 '피노 누아(Pinot Noir)'를 추천합니다.
- 선정 이유: 그림 속 와인은 진하고 텁텁한 레드가 아닙니다. 빛이 그대로 투과되는 맑은 루비색이죠. 피노 누아는 레드 와인 중에서도 가장 섬세하고 투명한 빛깔을 가졌습니다. 사전트가 포착한 유리잔의 투명한 미학을 가장 잘 보여주는 와인입니다.
- 즐기는 법: 여름 테라스의 기분을 내려면 와인을 평소보다 조금 더 차갑게(약 13~15도) 준비해 보세요. 가벼운 산미와 붉은 과실 향이 입안을 적시면, 마치 150년 전 베네쿠르의 어느 식당 그늘 아래 앉아 있는 듯한 몽환적인 기분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 비어 있는 잔을 채우는 것은 당신의 마음
사전트의 <와인잔>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오늘 당신의 잔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나요?"
때로는 북적이는 대화보다, 소중한 사람이 머물다 간 자리의 고요함이 더 깊은 위로를 주기도 합니다.
오늘 밤, 빈 잔이 주는 평온함 속에서 당신만의 투명한 휴식을 채워보시길 바랍니다.
[다음 편 예고]
강렬한 색채 뒤에 숨겨진 비극적 서사, [술과 명화⑰]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의 <아를의 여인(반 고흐의 초상)>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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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훈예찬(美醺禮讚): 빛을 담은 잔 하나가 오늘을 특별하게 만듭니다.
– 술이 술술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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