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8000년 와인의 숨결을 찾아, 친구와 함께 떠난 조지아
와인 한 잔에는 그 땅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고 했던가. 인류 최초로 와인을 빚기 시작했다는 8000년의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나라, 조지아. 그 신비로운 땅으로의 여정은 오랜 친구이자 현지에서 여행 가이드로 활동하고 있는 이 대표의 따뜻한 초대로 시작되었다. 단순한 여행지를 넘어, 와인의 시원(始原)을 직접 경험하고 그 깊은 향기에 취해볼 수 있다는 설렘은 이미 오래전부터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특히 조지아 와인의 정수를 느낄 수 있다는 '카레바 와이너리(Winery Khareba)' 방문은 이번 여정의 하이라이트와도 같았다.
I. 트빌리시에서의 첫 만남, 카레바 와이너리의 문을 두드리다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Tbilisi)에 도착한 후, 우리는 먼저 카레바 와이너리의 시내 사무실을 방문했다. 현대적인 감각의 사무실에서는 와이너리의 역사와 철학,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와인들에 대한 친절하고 상세한 소개를 받을 수 있었다. 그들의 자부심이 느껴지는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카레바가 단순히 와인을 생산하는 곳이 아니라, 조지아의 와인 문화를 계승하고 발전시키려는 열정을 가진 곳임을 알 수 있었다.
원래 카레바는 현대식 설비를 갖춘 테르졸라(Terjola) 셀러도 운영하고 있지만, 거리상의 문제와 조지아 와인의 진정한 깊이를 체험하기에는 카헤티(Kakheti) 지역에 위치한 전통적인 저장고가 더 적합하다는 판단 아래, 우리는 다음 날 카헤티로 향하기로 결정했다. 트빌리시 사무실에서의 만남은 앞으로 펼쳐질 와이너리 투어에 대한 기대감을 한층 더 부풀게 했다.
II. 카헤티로 향하는 길, 조지아의 겨울 서정(抒情)에 흠뻑 빠지다
다음 날 아침, 카레바 측에서 정성껏 준비해준 차에 몸을 싣고 카헤티로 향하는 여정은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이었다. 초겨울의 문턱,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조지아의 시골 풍경은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넘을 때마다 시야에 들어오는 광활한 포도밭과 아기자기한 마을들, 그리고 저 멀리 하얗게 눈을 인 채 병풍처럼 둘러선 캅카스 산맥의 장엄한 자태는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특히 곰보리(Gombori) 고개를 넘으며 내려다본 알라자니(Alazani) 계곡의 탁 트인 풍경과,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눈 덮인 산봉우리들은 오랜 시간 가슴에 남을 절경이었다. 친구 동희 대표는 조지아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며,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이동 시간을 풍요롭게 채워주었다. 와이너리로 향하는 길 위에서 이미 나는 조지아의 자연과 풍경에 깊이 매료되고 있었다.
III. 땅속에 숨겨진 와인의 성지, 카레바 와이너리 터널(Gvirabi)
드디어 카헤티 크바렐리(Kvareli) 지역에 위치한 카레바 와이너리 터널에 도착했다. 입구부터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가 감돌았다. 이 거대한 터널은 원래 군사적인 목적으로 건설되었으나, 연중 일정한 온도(12-14℃)와 습도(70%)가 유지되는 특성 덕분에 와인 숙성에 최적의 장소로 변모했다고 한다. 총 길이 7.7km에 달하는 여러 개의 터널로 이루어진 이곳은 그 규모만으로도 압도적이었다.
터널 안으로 들어서자 서늘하면서도 달콤한 와인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양옆으로 끝없이 늘어선 오크통과 병 숙성 중인 와인들은 마치 와인의 신을 모시는 신전의 비밀스러운 통로를 걷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은은한 조명 아래 반짝이는 와인병들과 터널 벽의 질감이 어우러져 신비롭고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곳이 바로 수많은 명품 조지아 와인이 탄생하고 숙성되는 심장부라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IV. 동굴 속 와인 시음, 조지아 아가씨의 깊이 있는 해설에 매료되다
터널 탐험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와인 시음 시간이었다. 터널 한편에 아늑하게 마련된 시음장에서 우리는 카레바를 대표하는 여러 종류의 와인을 맛볼 기회를 가졌다. 시골이라 소박한 분위기였지만, 와인을 서빙하고 설명해 준 젊은 현지 아가씨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앳되어 보이는 외모와 달리, 그녀는 각 와인의 특징과 품종, 양조 방식, 그리고 어울리는 음식까지 막힘없이 설명해내는 '내공'의 소유자였다. 그녀의 차분하면서도 열정적인 목소리에는 조지아 와인에 대한 깊은 자부심과 애정이 묻어났다.
우리는 사페라비(Saperavi) 품종으로 만든 묵직한 레드 와인부터, 르카치텔리(Rkatsiteli)나 므츠바네(Mtsvane) 같은 조지아 토착 청포도로 빚은 화이트 와인, 그리고 크베브리(Qvevri)에서 전통 방식으로 양조한 앰버 와인까지 다채로운 스펙트럼의 와인을 경험했다. 특히 크베브리 와인은 그 독특한 색감과 풍부한 타닌, 복합적인 아로마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친구와 함께 와인잔을 기울이며, 조지아의 오랜 역사와 자연이 빚어낸 맛과 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더없이 행복했다.
V. 오감으로 체험하는 조지아의 맛과 멋: 쇼티스 푸르네와 짜릿한 차차!
카레바 와이너리에서의 경험은 단순히 와인을 마시는 것을 넘어, 조지아의 문화를 오감으로 체험하는 특별한 활동들로 이어졌다. 가장 먼저 우리를 맞이한 것은 뜨거운 화덕에서 갓 구워져 나오는 '쇼티스 푸르네(Shotis Puri)' 빵 체험이었다. 길쭉한 카누 모양의 이 전통 빵은 '토네(Tone)'라고 불리는 원통형 점토 화덕 벽에 반죽을 척척 붙여 구워내는데, 그 과정 자체가 하나의 예술과 같았다. 화덕에서 막 꺼낸 따끈따끈한 쇼티스 푸르네는 겉은 바삭하고 속은 쫄깃했으며, 구수한 향기가 코를 자극했다. 어떤 와인과도 훌륭한 궁합을 자랑할 것 같은 순수한 맛이었다.
다음으로는 작은 방으로 안내받아 조지아의 전통 증류주인 **'차차(Chacha)'**를 시음하는 시간을 가졌다. 포도를 압착하고 남은 껍질이나 줄기(포마스)를 증류하여 만드는 차차는 그 도수가 상당히 높아 한 모금 넘기는 순간 목부터 속까지 짜릿한 열기가 확 퍼져나갔다. 하지만 그 강렬함 뒤에는 포도의 응축된 향과 은은한 단맛이 숨어있어 매력적이었다. 현지인들은 이 차차를 식전주나 소화제로 즐겨 마신다고 하니, 그들의 술 문화를 또 하나 배운 셈이다.
VI. 와인 향 가득한 오찬, 잊지 못할 조지아의 정(情)
다양한 체험 후에는 카레바 와이너리에서 정성껏 준비한 점심 식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햇살 좋은 야외 레스토랑(혹은 실내의 아늑한 공간)에서 맛본 조지아 전통 음식들은 그 자체로 훌륭했지만, 잘 페어링 된 카레바 와인이 곁들여지니 그 풍미는 더욱 극대화되었다. 고소한 하차푸리(Khachapuri), 육즙 가득한 힝칼리(Khinkali), 향긋한 채소 요리 프할리(Pkhali), 그리고 숯불 향 가득한 므츠바디(Mtsvadi)까지. 음식 하나하나에 담긴 정성과 와인의 조화는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친구와 함께,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웃고 이야기하며 즐겼던 이 오찬은 평생 기억에 남을 따뜻하고 행복한 추억으로 자리 잡았다. 이것이 바로 조지아 사람들이 말하는 '정(情)'이 아닐까 싶었다.
VII. 아쉬움을 뒤로하고, 또 다른 풍경을 향해
어느덧 카레바 와이너리에서의 꿈같은 하루가 저물어갈 시간. 짧은 만남이었지만 깊은 여운을 남긴 이곳을 떠나려니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친구 동희 대표의 안내로 왔던 길과는 다른 길을 통해 트빌리시로 돌아가기로 했다. 새로운 길 위에서 만나는 풍경 또한 놓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선사했다.
돌아오는 길, 우리는 멋진 산악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어느 호텔의 커피숍에 잠시 들렀다. 따스한 햇살 아래, 향긋한 조지아 커피를 마시며 방금 전까지 경험했던 카레바 와이너리에서의 감동을 되새겼다. 광활한 자연과 유구한 역사, 그리고 순수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조지아 와인의 매력에 다시 한번 깊이 빠져드는 순간이었다.
에필로그: 가슴속에 영원히 새겨질 조지아 와인의 향기
카레바 와이너리에서의 하루는 단순한 와이너리 투어를 넘어, 조지아의 역사와 문화, 자연, 그리고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8000년 와인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땅속 터널을 걷고, 그곳에서 숙성된 와인을 맛보며, 현지인들과 함께 그들의 음식을 나누었던 모든 순간이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수많은 사진 속에 담긴 그날의 풍경과 웃음들은 앞으로 내 삶의 중요한 길목에서 종종 꺼내보게 될 아름다운 추억이 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조지아를 찾게 된다면, 그때는 더욱 깊어진 와인의 향기처럼, 더욱 성숙한 마음으로 그 땅의 모든 것을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다. 와인의 요람 조지아, 그리고 카레바 와이너리가 내게 선물한 이 황홀한 경험은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이다. 친구 동희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관련 링크 참고
Winery Khareba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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